이동식사형집행에 해당하는 글 1

청산가리사진작가이동식(1940)사건#사형제폐지

올인부동산|2022. 6. 10. 1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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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6월 다시 사형제폐지가 불붙고 있다. 이번에는 사형제가 폐지될 확율이 대단히 높다. 지금까지 헌재는 위헌과 관련하여 재판관이 5명까지 폐지를 찬성하면서 단 한명만 더 폐지에 찬성하면 역사속으로 사라진다.(*주. 6명이 되면 위헌확정되어 사형제는 사라진다)

사형제가 존재해도 잔혹한 범죄비율이 줄지 않는다는 폐지찬성론자들이 가소로운게, 사형재 존재와 사형제 #실제집행은 천지 차이다. 즉, 하늘천, 땅지 사이의 간극이라는 소리다.

사형제라는제도는 하나의 학설이고, 사형제[집행]은 물리적 현상이다.

지난 30년간 사형이 집행되지 않아, 사형의 위화력(경고력)은 완전상실되었다고 볼수 있으나, 단 한번의 사형이라도 (물리적) 집행되었다면 살인범행은 급격히 줄었을것이다.

헌법재판소에 사형이 위헌이라고 청구한 사람은 하나같이 패륜범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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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019년 부모를 살해한 혐의로 재판을 받던 윤 모 씨가 자신에게 사형이 구형되자, "사형제는 위헌"이라며 헌법소원을 냈다. (*구형이 되자 신청했다)

(2) 23년 전 운전 시비가 붙은 신혼부부를 엽총으로 살해해 이미 사형이 확정된 정 모 씨도 헌법소송을 했다. 당시 신청이유가 "사형제는 인간으로서 존엄과 가치를 침해한다"며 "흉악범죄 예방 효과도 없고 잘못된 판결을 바로잡을 수도 없다"는 것이었다.

무기징역이 최종 확정되어 더이상 사형수도 아님에도 헌법재판소 청구 적격이 있는지 모르겠다. 하급법원이 스스로 사형제폐지를 헌법재판소에 청구한 위헌법률심사도 아니고, 헌법소원형 청구이므로, 해당 살인범이 변호사를 통해 청구한것으로 보인다. 사형수도 아닌사람이 헌법소원을 청구할 자격이 있는가? 청구적격 자체가 없어 보이는데, 헌법재판소는 받아준것으로 보인다. 재판단의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면 헌재는 판결을 알수 있기때문이다.

최근에는 4명을 살인해도 사형선고 자체를 하지 않아, 사법부 스스로 사형제의 폐지를 선언하였다. 결국, 금번 헌법재판소에서는 사형제의 폐지를 선언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국민의 반대비율이 무려 80%에 폐지반대해도 먹고사는데 지장없는 판사들에게는 남의 이야기다.

이번에 2022년 6월 9일 변호사사무실 방화로 7명이 사망했는데, 법조인들의 사망이 많을수록 사형제폐지에 경고효과를 줄수 있따.

다음에는 헌법재판소 법원 판사실에 불을 질러 판사 3명만 살해하면 이 사형제의 존폐에 대해 심사숙고하게 될 것이다. 모름지기 당사자가 뒤져봐야 피해자의 원한을 이해하고, 사형제 제도의 취지를 이해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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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보일러공 이동식(1940년생:당시 42세, 전과4범)은 한국사진작가협회 회원이었다. 그는 1982년 11월 이발소에서 만난 면도사 김경희(사망당시 24세)과 가까워진다. 희생양을 찾아나선 의도적인 접근이었다. 이씨는 버스안내양을 모델로 찍은 자작 사진집을 김양에게 보여준다. “출세시켜줄게. 나랑 누드 찍으러 가자.” “안돼요. 일해야 돼요.” “내가 일당 5만원을 줄게. 하루 쉬어.”

1982년 12월14일 (*주. 겨울이다.) 두 사람은 서울 시흥에 있는 호암산에 오른다. “옷 벗으면 감기가 들 거야. 감기약을 먹어둬.” 그는 미리 준비한 청산가리를 넣은 캡슐 두 알과 함께 물약을 그녀에게 준다.

산에 오르기 전 버스정류소 옆 약국에서 그가 감기약을 사는 걸 봤던 김양은 별 의심없이 그걸 받아 먹는다.

이씨는 죽어가는 김양을 니콘FE 카메라 2대로 촬영했다. 나중엔 옷을 벗겨 계속 찍었다. 21장의 연속 사진이 카메라에 담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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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 1월 신문들은 경찰이 내놓은 사진 일부를 대문짝만하게 실었다. 시시각각 고통에 가슴을 쥐어뜯는 인간의 모습은 지옥 그대로였다. 숨을 못쉬어 답답했던지 입을 벌린 채 그녀는 죽어갔다.

당시에는 살인범들의 얼굴과 피해자,피해사건현장을 여과없이 보도하여 왔다. 2022년에는 피고인조국이후 범죄자들의 인권이 하늘을 치솟게 되었다. 장단점라면 무엇일까. 그렇다. 범죄의 잔악상과 범죄에 대한 단죄요구를 사법부가 수용하게끔 하는 압력요소로 작용한다. 현재 2022년에는 범죄자들이 잔혹한 살인을 해도 보도를 금지하기 때문에 범죄의 잔혹상에 낭만성까지 부여되어 있는 상황이다.

이동식은 결혼 이듬해인 1976년 코비카 카메라를 구입한 것이 계기가 되어 사진에 입문한다. 이후 10여 차례의 대회 입상으로 실력을 인정받았다. “좀 더 극적인 장면을 찍고 싶었다.” 그가 경찰에서 실토한 자백이었다.

사람의 죽어가는 표정을 담기 위해 살인을 했다는 것이다. 이동식은 로버트 카파의 ‘어느 병사의 죽음’(1938년 9월 5일, 스페인 코르도바 전선, 죽어가는 병사를 촬영함)과 같은 극적인 장면을 남기기를 바랬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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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이사진과 관련하여 카파가 직접 입장을 밝혔다) 1947년 NBC라디오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그는 "스페인 안달루시아에서 공화파 병사 20여명과 함께 참호에 있었다"며 당시 상황을 들려줬다.

파시스트 기관총 앞에 구형 라이플만 든 공화파 병사들은 속수무책이었다. 공화파 병사가 잇따라 기관총 포대를 향해 돌진을 시도했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카파가 사진기만 참호 위로 들어 촬영하기를 네 번째, 바로 그 병사가 참호 위로 지나갔다. 카파는 그 사진을 보지 못했다. "그는 다른 필름과 함께 현상을 보냈다"며 "스페인에서 돌아왔더니 내가 그 사진으로 유명해졌더라"고 말했다.

카파의 육성은 1분59초 분량으로 국제사진센터에서 공개해 뉴욕타임스(NYT)가 최근 보도했다. NYT 사진 사이트(lens.blogs.nytimes.com)에서 들을 수 있다.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태어난 카파는 스페인 내전, 제2차 세계대전, 중일전쟁, 이스라엘 독립전쟁, 베트남전쟁 등 전쟁터를 찾아다녔다. 1954년 베트남에서 취재 도중 지뢰 사고로 41세의 나이에 사망했다

이 희대의 살인범은 1986년 5월 다른 살인범 4명과 함께 사형이 집행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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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어간 자와 죽인 자가 모두 사라진 지금, 저 섬뜩한 사진이 남아, 차가운 카메라의 눈 뒤에 숨은 야수의 빗나간 예술욕망을 증거하고 있다 (*주. 사형이 집행이 되지 않으면 어쩔뻔했냐. )


이동식(1940) 김경희청산가리살인 전말

1982년 12월 14일 서울특별시 구로구 호암산에서 24세 여성의 시신이 발견되었다.

조사결과 사망자는 퇴폐이발소 여종업원 김경희 씨로 밝혀졌다. 사망한 김경희는 사건발생전 5년전 대구에서 이미 결혼해서 2명의 아들을 출산하였으나, 남편의 심한 주벽으로 가출, 상경하여 서울시 구로구 변태이발소에 취직하여 면도사로 일자리를 구한것이었다.

김경희의 사망 발견 당시의 상태가, 일단은 독살로 추정되었으나 저항한 흔적이 전혀 없고, 시신이 옷을 벗고 바닥에 쓰러져 몸부림치다 사망했다는 것이다.(나체상태였는데, 이동식이 손을 묶고 옷을 벗긴것으로 범죄피해로 인한 사망으로 위장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 이유로 한국 경찰 역사상 최초로 프로파일링 기법이 동원되었으며 곧 범인이 잡혔다.

이 사건의 범인은 특수절도 등으로 여러 차례 옥살이를 했던 전과 4범으로, 복역 후 사진작가 겸 보일러 배관공으로 살던 이동식(李東植, 당시 42세)이었다.

그는 1940년 경상북도 대구부(지금의 대구광역시)에서 태어나 6살 때 부모를 잃고 고아가 되어 숙부 집으로 보내져 국민학교 과정을 마쳤으며, 14세 때 서울로 상경하여 15년 동안 폐지와 고철 등을 주우면서 넝마주이로 살아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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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차례 특수절도 혐의로 콩밥을 먹고 출소 후에 사진에 취미를 붙여 이것저것 사진을 찍으면서 살았다.

사진가로서의 재능은 출중해서 한국사진작가협회의 회원이 되었고 사진 공모전에서 10여 차례 입상한 경력도 가지고 있으며 개인 전시회까지 열었을 정도였다.

또한 배관공 월급이 수십만 원이던 시절에 150만 원짜리 일본제 카메라를 구비하고 있었다. 그 당시 일반적 SLR 카메라인 Nikon FE가 27만 원 정도로 국립대 한 학기 등록금 수준이었다.


하지만 그 기쁨도 잠시, 줄곧 특별한 아이디어를 고안해내지 못해 사진 공모전에서 고전을 면치 못하게 되자 그는 고심 끝에 죽음을 비롯한 더욱 자극적인 컨셉을 사진에 담기로 작정했다.

그는 죽음을 가장 극적이고 아름다운 순간이라고 생각했고, 후처를 모델로 네크로필리아적인 요소가 담겨 있는 사진을 몇 번이나 찍었으나 연출된 죽음에 대해 그는 만족하지 못했고 결국 살인에 이르게 된다.

(*캔디주: #네크로필리아 ( #Necrophilia )는 정신분석학자 에리히 프롬이 만든 범죄심리학 용어로 ‘시신·유골 애착증 환자’를 뜻한다. 시체, 죽음을 나타내는 그리스어 ‘νεκρός(nekros)’와 갈망을 뜻하는 ‘φιλία (philia)’를 합친 단어이다.

Krafft-Ebing의 1866년 작품 Psychopathia Sexualis에서 처음 거론되었다. 시신을 곁에 두려는 도착증 등 다양한 모습으로 표출된다. 이러한 행위는 윤리적, 법적으로 모두 금지되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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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자신이 다니던 퇴폐 이발소의 직원인 김경희(金敬姬, 당시 24세) 를 희생양으로 삼기로 결심한다.

모델로 출세를 시켜주겠다며 누드 사진을 찍어주겠다고 했다. 그 과정에서 당연히 자신의 수상경력으로 권위를 보여주었다.

그녀가 수락하자 함께 산에 올라갔고, 옷을 벗기 전 김 씨에게 추울 테니 감기약을 준답시고 사이안화 칼륨(청산가리) 약을 건네주었다. 감기약 캡슐 안에 넣은 청산가리를 김경희에게 먹인 이동식은 미리 설치한 2대의 니콘카메라로 약기운이 퍼진 채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김 씨의 모습을 21장의 사진으로 남겼다. 김 씨가 숨이 끊어지자 사체를 낙엽으로 덮은 후 옷가지와 신발을 40m 떨어진 곳에 버렸다.

이씨는 독약을 먹은 김 씨가 땅바닥에 쓰러지면서 몸부림치는데도 불구하고 죽어가는 장면을 21장이나 사진으로 찍은것이었는데 그야말로 역사적으로 전세계에서 전무후무한 인간의 사망과정을 담은 극악한 사진으로 남았다. 해당사진의 초고화질 원본은 해외에 고가로 원본이 팔렸다.(주.이것이 인간界 인것이다.)

김경희가 죽은 뒤에는 손을 묶은다음에 촬영을 하였고, 옷을 벗기고 촬영을 계속했다. (*나체사진도 압수당시 발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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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은 곧 피해자 주변 인물 수백 명을 대상으로 탐문수사를 시작했다.

주변 인물들은 그녀의 본명을 전혀 몰랐고, ‘진양’이라는 예명으로만 불렀다고 한다. 수사 초기에 김 수사지도관을 비롯한 수사팀은 ‘치정’ 관련 범행으로 가닥을 잡아 탐문을 벌여갔다.

김 씨의 단골 손님을 일일이 조사하던 중 자신을 사진작가로 소개한 한 단골이 그녀를 자주 찾았다는 진술을 확보했다.

사진작가의 집으로 찾아간 경찰이 “진양을 아느냐?”고 묻자, 사진작가는 태연하게 “안다. 단골이다”라고 답했다고 한다.

사진작가의 이름은 이동식(당시 42세).

본업은 보일러 배관공이나, 각종 공모전에서 11차례에 걸친 수상 경력을 갖고 있었고 개인전을 연 적도 있었다.

“사진을 좀 보자”고 청하자, 그가 자신의 작품 100여 장을 내놨다. 대부분이 여성의 나체 사진으로, 칼에 찔려 피를 흘리는 모습, 목을 맨 모습, 시체를 가장한 모습을 담은 사진 등 이상하고 기괴한 모습이 보는 이를 압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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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사팀이 사진에 정신이 팔려 있는 동안 이동식이 갑자기 문갑과 벽 사이의 공간으로 사진 1장을 급히 밀어 넣는 것을 서 반장이 포착했다.

사진은 무릎까지 올라오는 갈색 부츠에 회색 치마를 입은 여자가 낙엽 위에 누워 있는 모습이었다.

얼굴은 하얀 천으로 가려져있었다. 한 마디로 ‘사체성애증’을 표현한 사진이었다.


서 반장이 사진에 대해 집요하게 추궁하자, 이동식은 “모델을 고용해 연출 사진을 찍은 것”이라고 둘러댔다고 한다.

1장만 남아 있는 이유를 묻자 “사진이 마음에 들지 않아 다 버렸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숨진 김경희의 동거남이 사진 속 옷과 갈색 부츠를 보고 “진양이 맞다”고 확인해 줬고, “단골이었고, 이동식이 자신을 사진작가로 소개했다더라”는 증언을 했다.

당시 언론은 김 씨와 이동식이 애인 사이라는 보도를 일제히 내보냈으나 김 씨에게는 동거하는 남자가 있었고, 김 씨와 이동식은 만난 지 3주가량 된 사이에 불과했다.

심문과정에서 죄를 덜어보려는 이동식의 거짓말이었던 것이다.


체포된 이동식은 말을 바꿨다. 그는 “진양을 만난 것은 사실이나 사진을 찍고 보냈다”며 “내가 가고 난 후 여자가 자살했나 보다”라고 발뺌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당시 이동식이 가지고 있던 #니콘fe 카메라의 성능이 너무 좋아, 사진을 확대해도 선명도가 떨어지지 않아, 사망에 이르던 김경희의 피부의 솜털변화로 이동식의 진술이 거짓임을 입증했다고 한다.

즉, 총 21장의 사진속에서 1번부터 16번까지 극도의 고통으로 숨을 헐떡이며 죽어갔지만 살아있던 김경희의 솜털이 일어서 있었지만,

사망하여 신체기능이 정지된 16번사진, 그 순간부터 솜털이 일시에 눕혀진 것으로 보아, 현장에서 사망한것으로 확인이 되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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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사진촬영후 헤어져서 김경희 본인이 수치심에 독극물을 마시고 현장에 돌아와 자살했다는 이동식(1940)의 변명이 거짓말이라는 것을 사진의 초고화질 선명도로 입증할수 있었다.


경찰은 또 다른 살인 단서로 김모 씨로 밝혀진 사진 뒷면에 적혀진 현상소를 찾아갔다. 경찰이 찾아간 현상소는 종로에 위치한 무허가 현상소였는데, 현상소 직원은 이동식이 그동안 맡겼던 수상한 사진들에 대해 “범죄 현장 검증 사진인 줄 알았다”고 진술했다. 직원은 “이동식이 경찰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이동식은 경북 대구 출신으로, 6세 때 부모를 잃고 고아가 됐다. 그 후 그는 숙부 집으로 보내져 초등학교를 마치고 14세 때 상경했다. 이동식은 수유리 소재 재건대(1962년 정부에 의해 조직된 넝마주이 단체)에서 15년 동안 폐지, 고철 등을 수집하며 넝마주이로 살았다.

23세 때 처음 특수절도로 전과를 얻었고, 검거 당시 전과 3범이었다. 그는 1970년대에 베트남전에 참전한 경력도 있었다.


이동식이 수사관에게 자랑하듯이 보여준 열쇠고리엔 손가락 마디만한 물체가 매달려 있었다고 한다.

수사팀은 그것을 보고 사람 귀라고도 했고, 낙타 눈알인 것 같다고도 했다.

사람이나 동물의 신체 일부인 것 같았으며, 당시 이동식은 “이걸 지니고 있어 베트남전에서도 살아남았다”고 자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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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대 중반의 나이에 뒤늦게 사진에 취미를 붙이게 된 이동식은 한 사진공모전에서 닭이 피를 흘리며 죽어가는 모습을 담은 사진으로 입상하면서 사진계에 발을 들여놓게 된다.

그 후 유수의 공모전에서 여러 차례 입상하면서 1982년 한국사진작가협회에 가입했고, ‘신선하고 충격적인 사진을 찍는 작가’라는 평가를 얻었다. 그는 일본 누드 사진집을 탐독하면서 성과 죽음의 이미지에 빠져들었다.


한편 수사팀은 이동식의 집에서 숨진 김경희 씨의 모습이 담긴 사진 21장을 찾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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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사팀은 처음 호암산에서 발견됐을 당시의 현장 검증 사진 속 나체 사진과 옷을 입고 천을 덮고 누워 있는 초기 압수 사진을 비교하는 새로운 기법을 채택했다.


 

재판과 사형집행

검거 후 재판을 거치는 동안에도 혐의를 극구 부인하다가 사진 감정을 담당했던 모 대학 사진과 교수의 증언으로 이동식이 범인이었다는 사실이 완전히 탄로나자 홧김에 범행 일체를 자백했다.

결국, 범인 이동식은 1심에서 사형 선고를 받았고 이에 형량이 무겁다면서 항소, 상고를 거듭했지만 모두 기각당한 뒤 1984년 2월 16일에 사형이 확정 판결되어 2년 뒤 1986년 5월 27일 서울구치소에서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주. 범행후 4년이나 걸려 사형집행된 것이다. )


당시 그 주변에 의문의 실종이 된 여성이 벌써 스물 한 명 정도 있었다는 사실이 수사과정에서 밝혀졌다.

이 실종여성들이 이동식(1940)의 집에서 발견된 수많은 여성들의 인화된 사진속, 죽음연출사진이 연출이 아닌 실제 피살된 여성들의 사진이 아닌지 의심을 받고 있으나, 이동식의 진술거부로 밝혀지지 못했다. (*사진속의 여성들의 행방을 알수 없었다)


<전처살해여부>

그가 전처를 살해했다는 심증이 있었다. 전처의 가족들이 강하게 의심했고 심증으로는 살인의 가능성이 충분했다.

사건이 연일 대서특필 되자 전처 방옥수(당시 31세)의 가족이 수사팀을 찾아와 8년 전 실종된 방 씨를 찾아달라고 신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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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방 씨의 남동생은 “어느 날 낯선 사람이 찾아와 누나가 기모노를 입고 있는 사진 한 장을 건네줬다”며 “누나가 일본에 잘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더라”고 진술했다.

평소 이동식이 자신의 후처를 모델로 삼아 온갖 기괴한 사진을 찍었던 것을 생각하면 해당 사진 역시 이동식이 촬영했을 가능성이 있었다.

하지만 수사팀은 그것이 어떤 사진인지 끝내 밝히지 못했다. 이동식이 수사팀을 제 맘대로 농락하며 슬며시 “전처를 죽여 파묻었다”고 지시한 장소에서 어떠한 증거도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때마침 해외로 타전된 사건이 크게 이슈가 되면서 나라 망신이라고 생각한 당시 군사정권이 “사건을 빨리 덮으라”고 압력을 행사하는 바람에 수사팀은 여죄를 캐내지 못했다.

사실 추가 피해자들을 조사해서 밝힐 수도 있었지만, 이 사건 특유의 엽기적인 모습이 외신에 알려지자 당시 국제행사를 앞두고 있던 상황이라 추가적인 수사를 진행하지 못하게 막았고 수사를 종결시켰다.


피살된것으로 의심받는 이동식의 전부인 방옥수씨, 실종. 최후의 사진은 이동식이 촬영한 기모노를 입고 있었던 방옥수씨였다

처음에 이동식을 검거했을 때 이동식은 범행을 부인했다.

경찰은 유력한 증거인 피해자 사진을 찾기 시작했다.

그러나 현장에서도, 이동식이 거주한 보일러 현장 소장실에서도 결국 발견하지 못했는데 한 담당 형사가 그 소장실에 일부분만 도배가 되어 있는 걸 보고 벽을 두들기니 합판이 있다는 걸 발견, 합판을 뜯어내어 사진이 들어있는 필름을 발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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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자 이번엔 이동식이 '본인은 이미 죽은 이후에 피해자를 찍은 것일 뿐 본인이 죽이지 않았다'라고 발뺌했다.

형사들이 사진 작가를 비롯해 전문가들을 찾아다녔다. 그리고, 신구전문대(현, 신구대학교) 사진과 #홍순태교수 가 한 가지 조언을 형사들에게 해주었다.

그 조언은 사진을 현미경으로 확대해서 솜털이 서있으면 살아있었다는 것을, 솜털이 누워 있으면 이미 사망했다는 것을 의미한다였다.

경찰이 이를 바탕으로 검증한 결과 솜털이 서있는 사진부터 점점 누워가는 흔적들을 발견했고 결국 살아있을 때부터 죽어가는 사람을 찍었다는 것이 입증되면서 증거로 채택되었다.


이동식 입장에서는 결국 자승자박한 꼴이 되었는데, 본인이 사진작가였기 때문에 80년대 일반인들이 거의 쓰지 않는 고해상도의 카메라를 사용했고 덕분에 현미경 확대가 가능해 땀구멍이나 솜털을 확인해 증거로 채택될 수 있었다.


한편에서는 범인이 이 사진을 전시했는데 연출된 사진이라고 둘러댔으나 우연히 사진을 본 의사가 사진 속 인물의 동공이 풀려있는 것을 보고 실제 죽음을 찍은 것이라고 판단, 경찰에 신고했다는 설도 있지만 사실무근이다.

이 사건은 서울구치소의 서대문 시절의 마지막 사형 집행이었으며 이 사건의 범인인 이동식은 이곳에서 집행된 마지막 사형수다.

이 이후 서울구치소는 이듬해에 시흥군 의왕면(현 경기도 의왕시)으로 이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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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식은 서울구치소에서 복역 중 가톨릭에 귀의해 바오로라는 세례명을 받았으며, 사형집행 후 천주교 종로성당이 관리하는 나자렛 묘원에 묻혔다.

교훈

1. 예술어쩌구하는 남자를 주의한다. 일반인들과 다른 괴벽과 특성이 있다. 자기 예술혼을 과대 평가하고 심취하여 강력범죄를 저지르기도 한다. 예술가들에 의한 살인사건은 셀수 없다.

불우한 성장과정을 거친 이동식의 경우, 무시만 당하다가 우연히 사진전에 입상하고, 또 그 사진의 잔혹성이 세상에 도리어 인정받자 좀더 자극적인 사진연출을 통해 세상사람들을 놀래키고 인정받으려 했던 것이다. 사진협회주최측도 충격적인것, 괴이한것을 고상하게 평가하는 신선놀음에 심취한 측면이 있다.

https://m.blog.naver.com/ganghanii/222310854059

2. 남자가 산에 가자고 하면 따라가면 안된다. 남자는 애인도 해당된다. 남편도 해당하는데, 남편이 재혼남이면 특히 주의한다.

3. 사형제는 폐지를 하면 안되는것은 둘째치고 실제 물리적인 집행을 하여야 한다. 이동식이 사형집행당하고 나서 그렇게 똘기많은 사진기 하나들고 설치던 광기적인 사진작가들이 동일 범죄를 저지르지 않고 있다.

#양예원 사진작가흉내내며 성산업으로 진화했다.

해당 업계에서는 이동식(1940)의 기행과, 사형집행이 강한 각인된 사건으로 교육되고 알려져있기 때문이다.

다만 #출사 지랄하면서 여성 성기, 누드 사진 찍어 음란사이트에 판매하는 식으로 저렴화하는 경향이다. #양예원사건 이 디지털성범죄화하여 초대형사건으로 비화한바 있다. 사형집행하자. 윤석열의 운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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